2009년 11월 04일
학벌주의-여러가지 생각들
이명박 욕하는 건 거의 상식이 됐고, 한나라당과 뉴라이트를 비롯한 친일세력들을 척결해야 나라가 건전하게 발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외고 문제와 더불어 나타난 사람들의 학벌체계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나는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 구조에 학벌체제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일등, 엘리트, 부자, 주류를 선망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는 저열한 노예 근성 때문에 우리나라가 서민 중심의 세상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급기야는 소수 엘리트들의 과두정으로 전락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노예 근성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학벌체제와 성적 지상주의를 강제하는 왜곡된 공교육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학벌체제의 악영향은 서울대를 위시한 소수 명문대 출신들의 사회 권력 독점의 정당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소수의 권력자들 일반에게 순종해고 복종해야 한다는 노예적 관념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는, 좀 더 폭넓은 형태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성적이라는 획일화된 기준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의 우열 관계를 가려내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성적이 자기보다 좋은 사람에게는 머리 좋은 사람, 우등생, 더 나아가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퍼부으며 열정적인 숭배감을 표시하는 반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그와 똑같은 열정으로 열등아, 지진아, 못난 놈, 무가치한 놈, 문제아 등의 꼬리표를 붙이며 차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기만하는 술책들이 동원된다. 성적이 사람 간의 우열을 가늠하는 객관적인 지표라는 고정관념도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재능과 능력이 객관식 오지선다형 시험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말일까. 시험 문제 풀이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교에서 문제풀이 능력 외에 다른 재능이 중요하게 평가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사회 권력을 싹쓸이하고 있는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무엇보다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에서 최고득점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학교 교육의 근본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를 잘 푸는 것과 관계가 없는 여타의 재능들은 그대로 사장되고 만다. 그러니 다양성 교육이라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누히 강조되곤 하지만, 학벌체제 하에서 우리나라 학교가 그런 기특한 과제를 책임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할래야 발전할 수가 없다.
성적에 따른 우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생기는 정치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늘상 공부 잘하는 학생이 반장이나 전교 회장 같은 직위를 독점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예행연습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시험 문제를 잘 푼다는 것이 곧 다른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면, 성적이 높은 사람이 이 사회를 이끌어갈 핵심권력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대 출신들의 압도적인 권력 독점은 전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관계 요직을 한 대학 출신이 대부분 장악하고 잇다는 사실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노력 이데올로기가 끼여든다. 노력햇으니 그 만한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왜 노력의 대상이 하나여야 하는걸까. 대학입시에서도, 일반 공직에 진출하는 데도,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선발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험을 잘본다는 것이 곧 그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도 거의 언제나 입시나 고시만이 이들 분야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시험에 길들여진 정신은 수동적이고 노예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경제적 밑바탕이 튼실한 집안의 자제들인 경우가 많다. 시험에 합격하는 데는 노력 외에도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는 개인적 여건도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구체적인 여건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합격자의 노력 정도를 불합격자의 그것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높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서울대 입학생들의 집안 배경을 조사한 연구는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 외에도 개인적인 여건이나 가정적인 배경이 상당한 혹은 거의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열화된 대학체계에서 최상위 집단에 속하기 위해서는 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소수 부자들의 자녀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서울대 입학률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울대 입학생들을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로, 더 나아가 일종의 자수성가한 사람들로 간주하며 추앙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릴 적부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적만 좋으면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이 나쁜 사람은 선생과 부모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기본적인 자아존중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 반면 성적이 좋은 사람은 언제나 선생과 부모, 그리고 주위 친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겉잡을 수 없는 허영심과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을 정말로 뛰어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 일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성적 차별 행태를 보며 자란 학생들은, 나중에 성적에 따른 차별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간파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그들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강고한 성적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여, 서울대생들의 권력 독점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세뇌효과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을 찬양하도록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온 북한 주민들이 아무런 비판과 저항없이 기존 체제를 떠받들고 숭앙하는 모습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늘상 소수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모두가 일등이 될 수는 없고, 모든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적에 따른 차별화, 서열화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우등생과 다수의 열등생을 양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위 '서민'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했다는 이유로 멸시를 받아온 '열등생' 들일 수박에 없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그들의 자식들에게 줄곧 내뱉곤 한다는, '너는 나처럼 살지마' 라는 말에 아주 잘 나타나 잇다. 그것은 자기부정, 열등의식, 죄책감을 표현하는 말이지, 결코 긍지와 자부심을 표현한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식만큼은 자기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바로 자식들의 교육에 올인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학벌위계구조에서 될수 잇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타도록 자신의 자녀를 물심양면으로 교육시키는 일, 그것이 가난한 서민들의 계층 상승을 위한 노력의 실체다. 이것은 이들도 학벌집단의 권력 독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체제 순응적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강자에 대한 동경 혹은 존경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가난한 서민들이 한나라당과 이명박과 같은 일등, 주류, 부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정치세력에게 투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교육이 다수의 열등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양산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을 짓밟고 언제나 공부를 잘했던 부자와 권력자들만을 동경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잇다는 주장은 이러한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이데올로기와 학벌권력은 계급 문제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 시민들의 정신을 수동성과 노예적 근성으로 묶어두고, 소수의 권력자들이 손쉽게 자신들의 기득이익을 정당화할 수 잇는 도구, 그것이 바로 공교육이 뒷받침하고 잇는 학벌권력체계인 것이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지 않는다. 학벌 철폐 운동은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노예의식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기 위한 발본적인 정치투쟁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 구조에 학벌체제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일등, 엘리트, 부자, 주류를 선망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는 저열한 노예 근성 때문에 우리나라가 서민 중심의 세상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급기야는 소수 엘리트들의 과두정으로 전락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노예 근성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학벌체제와 성적 지상주의를 강제하는 왜곡된 공교육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학벌체제의 악영향은 서울대를 위시한 소수 명문대 출신들의 사회 권력 독점의 정당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소수의 권력자들 일반에게 순종해고 복종해야 한다는 노예적 관념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는, 좀 더 폭넓은 형태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성적이라는 획일화된 기준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의 우열 관계를 가려내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성적이 자기보다 좋은 사람에게는 머리 좋은 사람, 우등생, 더 나아가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퍼부으며 열정적인 숭배감을 표시하는 반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그와 똑같은 열정으로 열등아, 지진아, 못난 놈, 무가치한 놈, 문제아 등의 꼬리표를 붙이며 차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기만하는 술책들이 동원된다. 성적이 사람 간의 우열을 가늠하는 객관적인 지표라는 고정관념도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재능과 능력이 객관식 오지선다형 시험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말일까. 시험 문제 풀이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교에서 문제풀이 능력 외에 다른 재능이 중요하게 평가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사회 권력을 싹쓸이하고 있는 서울대에 입학하려면 무엇보다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에서 최고득점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학교 교육의 근본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를 잘 푸는 것과 관계가 없는 여타의 재능들은 그대로 사장되고 만다. 그러니 다양성 교육이라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누히 강조되곤 하지만, 학벌체제 하에서 우리나라 학교가 그런 기특한 과제를 책임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할래야 발전할 수가 없다.
성적에 따른 우열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생기는 정치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늘상 공부 잘하는 학생이 반장이나 전교 회장 같은 직위를 독점하는 것은 일종의 권력 예행연습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시험 문제를 잘 푼다는 것이 곧 다른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면, 성적이 높은 사람이 이 사회를 이끌어갈 핵심권력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대 출신들의 압도적인 권력 독점은 전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정관계 요직을 한 대학 출신이 대부분 장악하고 잇다는 사실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노력 이데올로기가 끼여든다. 노력햇으니 그 만한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왜 노력의 대상이 하나여야 하는걸까. 대학입시에서도, 일반 공직에 진출하는 데도,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선발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시험을 잘본다는 것이 곧 그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도 거의 언제나 입시나 고시만이 이들 분야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시험에 길들여진 정신은 수동적이고 노예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경제적 밑바탕이 튼실한 집안의 자제들인 경우가 많다. 시험에 합격하는 데는 노력 외에도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는 개인적 여건도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구체적인 여건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합격자의 노력 정도를 불합격자의 그것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높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서울대 입학생들의 집안 배경을 조사한 연구는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 외에도 개인적인 여건이나 가정적인 배경이 상당한 혹은 거의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열화된 대학체계에서 최상위 집단에 속하기 위해서는 사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소수 부자들의 자녀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서울대 입학률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울대 입학생들을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로, 더 나아가 일종의 자수성가한 사람들로 간주하며 추앙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릴 적부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적만 좋으면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이 나쁜 사람은 선생과 부모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기본적인 자아존중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 반면 성적이 좋은 사람은 언제나 선생과 부모, 그리고 주위 친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겉잡을 수 없는 허영심과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을 정말로 뛰어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런 일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성적 차별 행태를 보며 자란 학생들은, 나중에 성적에 따른 차별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간파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그들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강고한 성적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여, 서울대생들의 권력 독점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세뇌효과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을 찬양하도록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온 북한 주민들이 아무런 비판과 저항없이 기존 체제를 떠받들고 숭앙하는 모습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늘상 소수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모두가 일등이 될 수는 없고, 모든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적에 따른 차별화, 서열화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우등생과 다수의 열등생을 양산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위 '서민'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했다는 이유로 멸시를 받아온 '열등생' 들일 수박에 없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그들의 자식들에게 줄곧 내뱉곤 한다는, '너는 나처럼 살지마' 라는 말에 아주 잘 나타나 잇다. 그것은 자기부정, 열등의식, 죄책감을 표현하는 말이지, 결코 긍지와 자부심을 표현한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식만큼은 자기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바로 자식들의 교육에 올인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학벌위계구조에서 될수 잇으면 높은 자리에 올라타도록 자신의 자녀를 물심양면으로 교육시키는 일, 그것이 가난한 서민들의 계층 상승을 위한 노력의 실체다. 이것은 이들도 학벌집단의 권력 독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체제 순응적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강자에 대한 동경 혹은 존경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가난한 서민들이 한나라당과 이명박과 같은 일등, 주류, 부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정치세력에게 투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교육이 다수의 열등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양산함으로써 그들의 자존감을 짓밟고 언제나 공부를 잘했던 부자와 권력자들만을 동경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잇다는 주장은 이러한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이데올로기와 학벌권력은 계급 문제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 시민들의 정신을 수동성과 노예적 근성으로 묶어두고, 소수의 권력자들이 손쉽게 자신들의 기득이익을 정당화할 수 잇는 도구, 그것이 바로 공교육이 뒷받침하고 잇는 학벌권력체계인 것이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지 않는다. 학벌 철폐 운동은 사회 전반의 불평등과 노예의식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기 위한 발본적인 정치투쟁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 by | 2009/11/04 13:12 | 잡설 | 트랙백 | 덧글(2)



